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클레멘트 애틀리 (문단 편집) == 기타 == * 클레멘트 애틀리 내각에서 영국의 [[6.25 전쟁]] 참전이 결정되었지만 전쟁 도중인 [[1950년]] [[12월 4일]], 애틀리는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해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과의 미영정상회담 도중에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의 대공세를 만난 [[한국]]을 포기하고 [[유럽]]을 지키는 데 집중하자고 건의했다. 이때 트루먼 대통령은 "미국은 친구가 어려울 때 버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한국을 포기하면 우리를 믿고 싸웠던 이들은 죽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면서 애틀리 총리의 '한국 포기 건의'를 거절했다. * 소박하고 [[내향성|내성적인 성격]]이었다고 한다. 평소에도 사람과 거의 어울리지 않고 집에서 책을 읽는 걸로 소일거리를 삼았을 정도.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나 교류도 저렇게 친절하고 부드러운 미소만 지으며 경청하는 편에 가까웠지, 본인이 강경하게 자기 목소리를 키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알려진다. * 사회주의 성향의 총리임에도 한국전쟁 당시 즉각적인 파병을 결정한 총리였다.[* 영국은 미국 다음으로 많은 병력을 한반도에 보낸 나라였다. 참고로 3위는 캐나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3808918#home|‘요람에서 무덤까지’ 영국 좌파 애틀리 총리, 6·25 파병 왜?]]. 이는 미국과 소련의 냉전이 시작되면서 유럽식 [[사민주의]]의 구심점을 꿈꾼 애틀리 총리가 [[마르크스-레닌주의|소련의 공산주의]]와 유럽의 사민주의는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한 정치적 제스처도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또 미국이 2차세계대전 당시 영국을 도운만큼 애틀리 총리는 미국과 손잡고 49년 4월 공산권에 대항하는 서방의 집단방위체제인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의 창설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후 1950년 12월 한국전쟁이 길어질 조짐을 보이자 핵폭탄 사용이 거론되던 시기 [[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대통령]]을 만나 반대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실제 핵은 사용되지 않았다. * [[사회주의]]자이지만 철저한 [[반공주의]]자이기도 했다. 사회복지정책을 도입한 것만 보더라도 알 수 있지만 '부르주아를 때려잡고 프롤레타리아를 사회의 주류로 만들자'는 급진적인 사상 대신 '프롤레타리아를 (쁘띠)부르주아로 성장시키자'는 온건한 사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 노동당 당수로 재임하는 20년 내내 했던 일 중 하나가 당내의 친공세력들을 때려잡는 것이었다. 덕분에 그가 정계에서 은퇴할 쯤 노동당 내에는 공산주의 추종자가 거의 전멸해 있던 상황이었다. * 이렇게 좌파 내에서 공산주의자들은 무자비하게 때려잡았지만 기본적인 좌파적 대외관과 [[반파시즘]] 자체는 확실한 신념으로 내세웠다. [[스페인 내전]] 당시 무조건 불개입 정책을 고집했거나 아니면 공공연하게 친[[프란시스코 프랑코|프랑코]]성향을 보였던 당대 영국 정계에서 몇 안되는 친공화파 인사였으며, 공화국에 대한 영국의 지원을 주장했고, 스페인 현지 방문과 시찰도 나가 스페인에 있던 영국인 국제 여단 대원들은 애틀리를 기념하여 [[중대(군대)|중대]] 중 하나를 "애틀리 소령 중대" (Major Attlee Company)라고 개명한 적도 있었다. * [[사회주의 시오니즘|좌파시오니즘]] 지지자였다. 유대인들이 과거 자신들이 살았던 땅에서 자신들의 국가를 세울 권리를 강력하게 지지했다. 이러한 성향으로 인해 British Zionist로 평가받는다.[* 21세기 기준 서양에서 시오니즘은 좌파 사회주의 진영보다는 보수우파 진영에서 좀 더 지지받으며 일부 반제국주의 좌파 계열에선 시오니즘을 비판하는 경향이 있는데, 20세기 중반에는 사정이 달라서 오히려 서방에선 세속 좌파진영이 더 친[[이스라엘]]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세르 등 아랍사회주의가 본격적으로 대두되기 전에 중동국가에서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 북예멘, 튀니지, 모로코, 요르단, 리비아, 이란, 이라크를 비롯해 왕정 체제가 다수를 이루었고, 이스라엘이 아랍 연맹에 밀리는 약자의 입장이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스라엘 정계에서 사회주의 계열이 다수파를 차지하여서, [[이스라엘 노동당]]이 30년 가까이 장기집권을 했었기 때문에 노조가입률이 80%에 달하는 등 사회주의의 영향이 강했다 이스라엘식 자율농장으로 유명한 [[키부츠]] 역시 이 당시의 유산이다.] * 말년에 [[버트런드 러셀]]과 함께 [[동성애]] 차별법안을 폐지할 것을 주장하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19세기에 태어난 사람이란걸 감안하면 놀라울 정도로 진보적인 성관념을 가졌던 셈. * 집안은 꽤나 독실한 성공회 가문이었고, 형제 중 한 사람은 [[선교사]]기도 했지만 정작 본인은 [[불가지론]]자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대놓고 불가지론을 떠들고 다닌 타입은 아니었고, 내성적인 성격답게 본인의 종교관에 대해서도 짤막한 한 문장으로 표현했다. (당신은 기독교를 믿느냐는 질문에) "(기독교적) 윤리관은 믿지만, 허황된 헛소리(mumbo-jumbo)는 믿지 않소." * 별명은 클램(Clem)이었다고 한다. * 정치적 라이벌이자 동지이기도 했던 윈스턴 처칠이 [[시가(담배)|시가]] [[골초]]로 유명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애틀리는 [[파이프 담배]] 애호가였다. 시가를 문 처칠이 "[[Keep calm and carry on]]"이란 유명한 표현이 상징하듯 절박하지만 겉으로는 일부러 태연한 모습을 보이던 전시 영국의 뚝심, 결의를 상징한다면 애틀리의 파이프는 피면서 중간에 계속 관리와 불조절을 해줘야하는 파이프처럼 전후 재건기의 차분한 냉철함을 보여주는 듯한 강렬한 대조를 이룬다. [[파일:why clem invented nhs.jpg|width=400]] * 손자(3대 애틀리 백작 존 애틀리)가 [[보수당(영국)|보수당]] 의원으로 현재 영국 상원에 재임 중이다. 이목구비가 할아버지를 아주 빼다박은 듯 생겼다. 애석하게도 백작위의 후계자가 없다. 애틀리 백작의 상속자가 되는 조건은 1대 백작의 남성 직계 후손인데, 남성 후손이 손자 1명밖에 안남았다. * 총리 중 마지막으로 정계를 은퇴하고 얼마 안돼서 세습 귀족을 받은 총리다.[* 총리 중 마지막으로 세습귀족을 받은 건 [[해럴드 맥밀런]]이지만, 맥밀런이 총리를 할때 [[일대귀족]]이 만들어지고, 수여도 했었는데 정계 은퇴 후 그마저도 받지 못하다가 20년 뒤(...) [[마거릿 대처]]에 의해 스톡턴 백작위를 받았으니 제외.]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